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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Real 잡동사니

학자의 길을 걷다..

by 밝은생각쟁이 2015.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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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news.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13605442

 

지난해 12월 31일 대구 범어동 일식집. 두 대학교수 가족이 마주했다. 이미 가족끼리 아는 사이였건만 침묵이 흘렀다. 이 자리에 있는 이원경(59) 영남대 기계공학부 교수가 정년을 거의 7년 남기고 느닷없이 명예퇴직서를 낸 직후였기 때문이다. “강의할 열정이 사라졌다”는 이유였다.

 함께 있던 같은 학교 김용찬(58·수학교육과) 교수가 이 교수의 부인에게 말을 건넸다.

 “이 사람과 살아온 것 후회하지 않습니까.”

 “후회 않는다”란 답이 돌아왔다. 그러자 김 교수는 이 교수의 아들을 보며 말했다. “네 아버지, 존경한다.”

 동료 교수로부터 “존경한다”는 말을 듣는 이원경 교수. 그는 정년 65세를 6년여 앞두고 지난해 말 명예퇴직 신청을 했다. 그가 대학 측에 밝힌 퇴직 이유는 이랬다. “열정이 사그라들었는데 교육자로서 양심상 어떻게 강단에 남아 있겠느냐. 더 열정 있는 후배들이 들어오게 하는 게 맞다.”

 사실 그에게 ‘열정 없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동료 교수와 제자들은 평했다. “대쪽 같은 성격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들 했다. 휴강은커녕 강의 시간에 늦는 법조차 없었다. 2012년엔 대학이 주는 ‘강의 우수상’을 받을 정도였다. 제자 안동현(23·첨단기계전공 2년)씨는 이렇게 말했다. “강의는 항상 열정적이었다, 시험문제는 어렵고 학점도 후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를 풀고 나면 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 강의가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노석균(59) 영남대 총장은 이 교수를 직접 만나 나가지 말아 달라고 했다. 필요하다면 안식 휴가를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만 허사였다. 이 교수는 “결심이 바뀌기 전에 수리해 달라”고만 했다. 아직 명예퇴직 신청이 공식 처리된 것은 아니지만, 이 교수의 뜻이 완강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영남대 측 설명이다. 이 교수는 ‘고고한 선비의 표상’인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후손이다. 영남대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석사,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에서 박사를 받았다. 1980년 모교에 교수로 돌아왔다.

 세상을 원칙대로 살았다. 김용찬 교수와 학교 인근 산을 등산하려던 때였다. 학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산을 넘으려던 참이었기에 김 교수는 태워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또 다른 교수에게 태워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이 교수가 “우리가 등산하는데 왜 연구하는 동료에게 폐를 끼치느냐”며 나무랐다. 김 교수는 “별생각 없이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종종 비정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게 바로 이 교수”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휴대전화·자동차·골프채가 없는 ‘3무 교수’로도 불렸다. 늘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수시로 울리는 휴대전화와 골프채는 연구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장만하지 않았다.

 이 교수는 가까운 동료들에게도 이 시점에 물러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왜 열정이 식었을지 그저 추측할 뿐이다. 동료 교수들의 생각은 이랬다. “몇 년 전 만 해도 3명 박사를 배출하면서 참 잘한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그 뒤론 대학원생을 받지 못했다. 이공계 기피 때문이었다. 학부생만 데리고서 하기엔 어려운 수학을 이용해야 하는 이 교수의 전공 연구에 한계가 있다. 그러면서 연구열이 식었고, 더불어 강의열도 전만 못해졌을 것이다. 그래도 웬만하면 정년을 누렸을 텐데….”

 이 교수는 왜 물러나려는지 구체적으로 물어보려는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e메일로 짧게 생각을 밝혀 왔다.

 “학자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발견을 해서가 아니라 퇴직과 관련해 주목을 받는다는 게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부디 저에 대한 관심을 접어 주시길 바랍니다.”

대구=송의호 기자  

 

명절이 끝났다.

 

친척들이 묻는다.

이제 좀 안정적인 직장을 가졌냐고.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럼 그 공부는 언제 끝나고 어떤 안정적인 직장이 보장되냐고.

되묻는다.

 

모르겠다...

 

풍족하게 살지 않았다.

그건 확실하다.

병원에 계신 부모님께 중학교 때 준비물 살 돈을 달라고 하기 미안해서

(달라고 했으면 빚을 내서라도 해주실 부모님이셨지만..)

준비물이 없어 혼나기 일쑤였으니까...

 

나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공부를 잘 하냐?

그것도 정말 아니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컨퍼런스 발표 자료를

얼른 마감해야 할 프로젝트 보고서를.

 

한 줄 한 줄 써가는 것도 참 괴로운 일이니...

 

 

 

재능도 없고,

안정적인 길이 보장되지도 않음에도..

 

 

이 길을 걷기로 하였다.

 

 

고졸취업문화확산,

능력중심사회

 

이 것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장그래가 스펙 때문에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

장배기가 자신이 쏟았던 스펙으로 인해 입직했을 때 괴로워했던 것,

수많은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단지, 입사를 위한 스펙에 어마어마한 경제적, 시간적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입사한 후 재교육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우리 특성화고 아이들이 열심히 해 사회에 나와도 고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하대 당하는 사회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교육 하나 없이 교사만 믿고 열심히 해주는 고마운 아이들이 있다는 것(그것도 상당하다는 것),

 

 

혹자가 그런다.

이미 사회가 그렇다고..

 

 

나도 생각한다.

무관보다 문관이 더 우세하다고 여겨졌단 선비 문화, 유교 문화를 뿌리로 두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어렵다고...

 

 

하지만 또 생각했다.

영화 변호인에서 나왔던 것처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계란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냐며...

 

 

대한민국의 많은 청년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괴로워한다.

너무 노력해서, 과거에 노력하지 않아서,

 

나 하나가 연구한다고...

세상이 바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약간의 생명, 계란보다도 힘없는 생명을, 보태고자 하는 것일뿐....

 

 

 

박사과정을 한다고 해서,

교수가 된다는 것이 목표이거나,

어느 연구소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이거나,

그러지 않아....

 

조금은 부끄럽다...

목표 없는 삶인 것 같아....

 

 

다만, 나는...

그냥 주어진 일에 열심히 하고 싶다.

 

교수가 되지 않는다고, 어느 연구소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졸업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 박사과정의 선택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기에....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되고, 육아에 전념하느라,

공부가 중단된다 할지라도...

 

 

그냥...

어느 의미 있는 하나에 ,

작은 목소리를 냈던 것만으로 ,

내 서른 하나는 가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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